뭐가 괜찮다는거야/호밀밭의 파수꾼(J.D.SALINGER) #독후감

찌질한 고백을 한다.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 무거운 마음의 이름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비좁은 장롱에 꾸역꾸역 이불을 밀어넣듯이 꾸역꾸역 숨겨놓은 불안감이 삐져나온 것이다. 공익근무라는 인생의 한 단계가 끝나는 것도, 24살이라는 어정쩡한 나이의 무게와 함께 그 고민이 삐져나오는데 한 몫 했으리라 본다. 20대 중반,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데, 이제 군대라는 핑계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생들처럼 맹목적으로 뭔가를(스펙을, 고시를, 취직을) 준비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미래를 아무데나 던지기 싫다. 그런데 내가 누군지에 대해 생각할수록, 나는 뭔가를 열렬히 좋아해본 적이 없다. 나에 대해 생각할 수록 '나'는 닿지 않는다. 내 그림자를 내가 밟을 수 없듯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혼자 찌질한 건 아니고, 사회에서 말하기를 불안한 시대에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세대라고들 한다. 88만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베스트셀러들이 머리속에서 떠오른다. 현실적인 문제와 실존적인 문제 사이에서 내가 이렇게 어지러워하는 차에 우연히 비슷한 고민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KBS에서 최근 방영한 "서른살, 괜찮아" 라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텔레비젼 다큐멘터리 같은 것에서 이렇게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안에 비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고민을 하는가, 형들이랑 술자리하듯 그냥 담담하게 듣고 싶었다. 이립이라는 서른살의 나이에 여기 저기에 지싯지싯 붙어있는 사람들은 아마 나보다는 더 불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최악이었다. 어떤점이 최악이었느냐 하면, 배경음악이 깔린다는 점이 최악이다. 서른의 나이에 고시생활하는 사람, 인터넷 쇼핑몰을 하는 데 제대로 운영이 안되는 사람, 닭집하는 젊은 부부 등 고생하는 사람들의 삶의 알맹이들이, 그냥 감상주의적인 배경음악으로 흘러버린다.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 눈물이나 글썽이고 다시 일하러 가란 소린지. 

괜찮아 서른살 이라는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깔리는 음악들은 다 그냥 '너 어쩌냐, 힘들겠다, 그래도 괜찮다. 힘내라.'는 시시한 위로였다. 다시보고 고쳐봐도 이 다큐멘터리의 메세지는 뻔하고 시시한 위로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다지 싫어하지도 않는 것은, 적어도 힘내서 어떻게 살아보라는 조언은 하는데 (물론 뻔한 자기계발서에서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라서 별로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조언 근처에도 가지도 못하고 응 그래 힘내 정도의 위로에서 그쳐버린다. 그런 위로라면 차라리 영상을 꺼버리고 음악만 내내 틀어주는게 나았을 테다.

마침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던 참이라 더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면 늘 주인공의 성격을 동경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동화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따라가니까 말이다. 모든 인간 행태가 싫은데, 그렇게 싫은건 분명한데 좋은건 잘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갈 곳없는 불안함과 두려움. 주인공 홀든이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음이 내 마음의 공허함과 공명했다. 홀든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시껄렁한 위로하지 말라고,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10대의 홀든과 20대의 나,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나온 30대가 안고 있는 불안감은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미국의 호황기였던 50년대에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돈 걱정 없이 살아가는 도련님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30대의 고민을 공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가 땅을 기고 있는 시대. 한국 30대의 고민은 생활의 고민이자 생존의 고민이다. 예컨대 34세의 나이에 공연으로 밥벌어먹기가 힘들어서 애지중지하던 기타를 팔러 갔다가 차마 팔지 못하고 다시 끌어 안고 연습실로 향하는 음악가가 있다. 그의 모습을 보고, 홀든은 마티니를 한잔 마시면서 썩 마음에 든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를 팔게 만드는 빌어먹을 사회를 욕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음악가의 구차한 문제의 무게를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에서 마티니나 마시면서 어떻게 매 끼니 라면을 먹는 애환을 이해한단 말인가?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그러면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은 첫째로 주인공 홀든이 철저하게 순수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사람들, 속물인 사람들,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그냥 무례한 사람들을 처절하게 싫어한다. 타협도 없다. 이를 갈고 침을 뱉는다. 그리고 아이들과 순수한 사람들을 또한 철저하게 좋아한다. 홀든이 유일하게 하고싶은 일이란,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위험한 벼랑으로 향하는 아이가 있으면 붙잡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렇게 순수한 영혼이 분명히 실제로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 중에서 안톨리니라는 주인공의 선생님이 한 말을 대충 옮기자면, '인간 행태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심지어 염증이 난 사람이 너가 처음은 아니다. 다행히 그 사람들이 기록을 남겼고, 우린 그걸 볼 수가 있다. 그게 역사고 시(poetry)이다.' 

셋째로 이렇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삭막하고 힘든 침체의 시기라도 이겨낼만한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소박한 믿음이자 위로이다. 불황과 침체라는 현실의 단단한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겠지만, 그런 고민의 동력이 되는 것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인간이 너무너무 싫은 사춘기 소년의 일화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다니, 어떤 점에선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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